백우산의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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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 백우산 기슭 매지골이라는 마을에 초맹삼이란 어질고 착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라고는 火田에서 나는 감자 옥수수 콩 따위의 밭곡식 뿐이고 쌀은 이웃 동리에 가서 몇 되 구해다가 조상의 제사때나 쓰는 형편이었다. 그의 부인 허을란여인 역시 마음이 착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여 인근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항상 시름에 잠겼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소생이 없어 대를 이을 옥동자를 얻기가 평생의 소원이었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백우산에는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색동 저고리를 입혀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부가 오전 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데 설악산으로 간다는 늙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마음이 착한 부부는 뛰어내려가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스님을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앉히고 강낭콩을 넣은 밀범벅을 대접한 후 농사지은 콩을 한 되 독에서 떠다가 시주했다. 그랬더니 스님은「나무아미타불」을 몇 번 되뇌이고는 홀연히 그 곳을 떠났다.
가을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백우산에는 화창한 새 봄이 왔다. 이 때 이들 부부에게는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부인의 몸에 태기(胎氣)가 생긴 것이다. 최씨 부부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기왕이면 떡두꺼비 같은 옥동자를 낳아 주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가을이 되자 부인은 드디어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아들을 낳았다. 부부의 기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일 뿐 즐거운 일에는 슬픔이 따른다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백 일이 지나기도 전에 기운이 장사였고 더욱 이상한 것은 밤마다 살그머니 나갔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부는 차츰 겁이 나고 기이하게 여겨 하루는 몰래 뒤를 따라가 숨어서 아들이 하는 행동을 훔쳐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어린 아이는 칼을 들고 무술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행동은 신출귀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비호 같았다. 숨을 죽이고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본 부부는 장수 아이를 낳은 것을 깨닫고 놀라움과 근심으로 그 자리에서 실신할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방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남 몰래 통곡했다. 그 당시에는 장수를 낳으면 나라에 화를 입힌다고 하여 아이가 성장하여 힘을 쓰기 전에 부모의 손으로 죽여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도 중죄를 받아야 했다. 장수 아이는 자라면서 무슬이 점점 뛰어났고 그 소문은 동네에 널리 퍼져 나갔다. 부부는 애를 태우면서 아이가 방에서 글을 읽는가하고 들여다 보면 어느새 강변에 나가 칼싸움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장수아이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원주에 있는 監營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장수 아들을 죽이기로 했다.
어느 비 내리는 밤, 뇌성은 천지를 뒤흔들고 번개불이 쉴새 없이 번쩍였다. 부부는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잠자는 아들의 몸 위에 콩 두 가마니를 얹었다. 그러나 아들은 움직이지만 못할 뿐 두 눈이 말똥하여 저주하는 눈으로 부모를 쳐다 보았다. 이들은 콩 한 가마니를 더 얹어 장수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장수가 죽자 장수를 따라 나타났던 용마가 울며 헤매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도 도관 2리에 「우렁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은 그 때 용마가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쉴 바위」라고 불리우는 5평이 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장수가 쉬었던 바위라고 전해지고있다. 그 곳에서 3km 떨어진 곳에「약세」라는 곳이 있는데 용마의 죽통과 말 발자국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장수를 모실 수 없게 된 용마는 슬피 울면서 헤매다가 크게 한번 뛰어 영월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영월에는 용마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며 장수 아들을 죽인 부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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